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에비 왕국 (문단 편집) === 기록의 암흑기와 가톨릭으로의 전환 === 레미스문트 이후, 수에비 왕국은 90여 년간 왕들의 행적과 주요 사건에 대한 기록이 일체 전해지지 않는 '기록의 암흑기' 시대에 접어들었다. 수에비 측은 자국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5~8세기의 이베리아 반도 역사를 저술한 이베리아-로마 역사가들은 반도 북서쪽 구석에 자리잡고 가톨릭이 아닌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며, 로마인들을 박대하는 그들을 야만인으로 여겨 상종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큰 사건을 저지르거나 연루되지 않는 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고학 연구와 희소한 문헌 자료에서 몇몇 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들이 어떤 통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에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면서, 당대 역사가들은 비로소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성 마르틴의 기적>에서 차라리크 왕의 일화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차라리크가 군림하던 시기 수에비 왕국의 백성들은 [[나병]]으로 크게 고통받았다. 급기야 차라리크의 아들마저 나병으로 고통받자, 왕은 아들을 구학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이때 투르의 주교 마르틴이 치유의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는 마르틴에게 사절을 보내 아들을 고쳐준다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마르틴이 성인의 유물을 보냈고, 유물이 수에비 왕국에 도착하자 왕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이에 왕과 궁정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마르틴은 수에비 왕국의 영역인 [[갈리시아]]로 가서 30년간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가 580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계는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르, 비클라로의 요한 등 5~8세기 이베리아 반도 역사의 주요 저자들은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고, 수에비 왕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가톨릭 공의회인 제1차 브라가 공의회 문서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의 학자들은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는 558년 5월이나 559년 4월 사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아리아미르]]''' 왕의 치세부터였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561년 5월 제1차 브라가 공의회를 개최해 가톨릭을 왕국 각지에 전파하는 방한을 논의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아리아미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테오데미르]]''' 왕 아래에서 수에비족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그의 치세에 갈리시아의 대주교가 된 마르틴은 두미오 수도원을 세웠고, 561년에서 572년 사이에 브라가의 대주교를 맡았다. 동시대인들은 마르틴을 "갈리시아의 사도"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저서 <평민의 교정에 관하여(De correctione rusticorum)>에서 평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교도 관습을 근절하는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태오데미르는 569년에 개최된 제1차 루고 공의회에서 왕국 내 교구 수를 늘리는 등 가톨릭 진흥 정책을 추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